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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23년 만에 다시 뭉친 들국화

즐락지기 2012. 7. 9. 16:42

[사람 속으로] 23년 만에 다시 뭉친 들국화

 

 

 

 

계급장 떼고 ‘톱 밴드’ 나가려 했는데 마감 지났더라

‘안녕이란 말 때문에 울지마. 그건 너의 작은 착각일 뿐야’.

5일 서울 양재동의 한 지하 연습실. 건반과 베이스·드럼 연주에 맞춰 낯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1980년대 한국 록밴드 들국화의 멤버 전인권(58·보컬), 최성원(58·베이스), 주찬권(57·드럼)이 거기 있었다.

그들은, 그리고 음악은 그대로였다. 기교 없이 부르지만 가슴이 멍멍해지는 노래, 여전히 한낮 실내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까지. 들국화는 85년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을 부르며

국내에 처음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89년 공식 해체를 선언하며 꽃이 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23년 만에 재결성에 나섰다. 7일 대구에서 시작해 13·14일엔 서울, 21일엔 부산까지 전국 투어 콘서트도 연다.

반갑다. 하지만 묻고 싶다. 대체 왜, 어떤 음악을 들려주려고 다시 뭉친 것일까.

각자 음악색깔 찾아 해체

처음 보는 순간 많은 질문이 생략됐다. ‘건강하냐’ ‘목소리는 괜찮냐’부터 ‘여전히 서로 호흡이 맞느냐’까지.

전씨는 목소리 톤이 높고 우렁찼다.

 담배를 태우면서 “블루스 음색을 내기 더 좋아졌다”고 우스개 변명도 했다.

대화 내내 최씨와 전씨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고, 말수 적은 주씨는 이따금씩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 띄워줬다 면박을 줬다, 진지해졌다 이내 농담을 했다,

연주하듯 인터뷰에 응했다(괄호 안은 각자의 성 표기).

●오랜만에 뭉쳤는데 계속 함께했던 것 같다.

 “셋은 같은 종족이라고 보면 된다. 혼자는 외롭고 심심하다. 아내 다음으로 서로 통한다.

예전에도 그랬다. 가령 내가 밤에 ‘이 중간 사운드 부분은 이렇게 해야지’ 생각했는데

다음 날 성원이가 그 노래를 꼭 그렇게 부르고 있더라. 찬권이는 드럼 생각하고(전).”

“조용필·남진·김민기·송창식 다 훌륭한 가수들이지만 이 나이에 음악적 친구가 있나.

한평생 살면서 각자 고집이 생겨 자기의 주장을 굽히고 뭉치기가 힘들다.

우리니까 이게 가능한 일이다(최).”

●1집 멤버인 조덕환씨는 함께하지 않았는데.

 “걔가 아직 세다. 나중에 할 얘기가 더 많을 거다(전).”

●그런데 당시 멤버들이 왜 헤어졌나.

 “각자 하고 싶은 음악적 색깔이 달랐다. 인권이는 파워풀하고 무거운 록, 찬권이는 클래식한 전통 하드록,

그리고 나는 여자나 꼬셔볼까 하고 사이먼 앤 가펑클처럼 부드러운 음악을 원했다(웃음·최).”

이때 느린 말투의 주씨가 거들었다.

“해체할 땐 1년만 떨어지자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왔다. 참.”

‘들국화’의 길, 혼자서는 못 가는 길

이번 공연의 포스터. 왼쪽 아래는 교통사고로 숨진 1집 원년 멤버 허성욱.
 이후 셋은 각자의 음악적 성격대로 활동을 했다. 최씨는 ‘제주도의 푸른 밤’

 ‘솔직할 수 있도록’ 등 솔로 앨범을 냈고 최근엔 디지털 싱글 ‘사람의 풍경’을 발표했다.

1집에 객원 멤버로 참여했다 2집부터 정식 멤버가 된 주씨는 6집까지의 솔로 앨범 외에도

사랑과 평화, 신촌블루스 멤버들과 슈퍼세션이란 밴드를 결성해 앨범을 발표했다.

전씨 역시 4집까지 솔로 앨범을 냈다.

●이제 와서 또 합치는 이유는 뭔가.

 “들국화를 떠나서도 우린 모두 좋은 뮤지션들이다. 작사, 작곡, 편곡, 보컬까지 다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들국화가 했던 일을 하려면 뭉칠 수밖에 없더라. 그때처럼 우리나라의 막장 문화를 바로 하려면(최).”

 

 ●막장이라니.

 “그때는 심의제도가 있어서 오직 음악은 방송과 신문으로만 알려지던 때다.

라이브 클럽도 법적으로 막아놨고. 그 틈을 타 독재정권 하에서 막장 가수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똑같다. 포털사이트 10개 뉴스 중 8개는 걸그룹 공연에서 노출이 어떻다,

누구 이혼했는데 위자료는 얼마다…. 이런 게 우리나라 톱뉴스다.

옛날 막장이 독재 문화라면 지금은 인터넷 막장이다.

노래도 자본의 힘으로 만든 아이돌이 장악했다. 진짜 음악을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이들한테 희망을 가져다주고 싶다(최).”

 한참 듣던 전씨가 대뜸 노래 가사를 읊조렸다. “조금은…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미안한 웃음으로….

난 눈을 씻고 봐도 이거 버금가는 가사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뭉친 거다.”

 이 노래가 실린 1집은 2007년 대중음악 전문가들이 꼽은 ‘국내 100대 명반’ 1위에 올랐다.

‘행진’ ‘세계로 가는 기차’ ‘매일 그대와’ 등 9곡 전곡이 히트를 쳤다. 최씨는 “10년 넘게

언더그라운드에서 일하던 멤버들이 응어리를 품다 터져 나온 앨범”이라고 회고했다.

●음반시장이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우린 신곡 안 할 거다. 신곡보다 명곡, 한국사람들이 진짜 감동할 명곡을 낼 생각이다.

새 앨범 내겠다고 곡을 만들 생각은 없다(전).”

●명곡이란.

 “그 음악을 듣고 자기 인생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생을 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곡이다(전).”

 최씨가 설명을 보탰다. 이미 새로 나올 앨범 타이틀도 정해놨다고 했다. ‘들국화 포에버’.

1집부터 각자 솔로로 활동했을 때 만든 노래까지 마스터 피스로 녹음할 계획이다.

진지한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그는 화제를 돌렸다. “요즘 여기저기 밴드 붐이 일어나지 않나.

우리도 거기 일조하려고 ‘톱 밴드’(KBS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에 그야말로 계급장 떼고

출연하려고 했다.

2억 상금도 따면 좋고(웃음). 밴드 활성화를 위해 출연하려 했는데 신청 마감이 몇 시간 지났더라.”

“인권이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사실 들국화의 재결성은 처음이 아니다. 87년 돌연 해체한 뒤 1집 원년 멤버 허성욱(건반)의 교통사고

사망을 계기로 공연을 했다. 하지만 활동은 이어지지 않았다.

최씨는 당시를 두고 “인권이 목소리가 최악의 상태였다. 그때만 해도 마약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2008년 전씨가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5번째 수감됐다 출소한 뒤 관계는 더 소원해졌다.

●세 명이 또다시 뭉친 계기가 뭔가.

 “팬클럽하고 얘네 두 명이 나를 요양원에 보내줬다. 1년6개월 있다 나왔는데

찬권이가 내 꼴이 어떤지 보러 왔더라. 그러면서 들국화 다시 하자고.

그래서 같이 성원이가 사는 제주도로 가자고 했다(전).”

 바로 최씨가 말을 받았다. “긴가민가했다. 왜냐하면 난 나름대로 자전거도 타고 인생을 잘 보내려고 했으니까.

둘이 중문에 있는 한 라이브 카페로 왔더라.

거기 키보드가 있어서 오랜만에 인권이가 ‘그것만이 내세상’ 등 3곡을 불렀다.

손님이 스무 명쯤 있었는데 일단 내가 놀랐다. 인권이 노래를 81년에 처음 들었는데,

이날 노래가 가장 좋더라. (전씨는 “목소리가 안 나왔을 때도 악보를 기억하며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그래도 난 그냥 자전거 타면 되겠구나 했는데 또 같이 하자고 오더라.”

 그는 다시 만났을 때 전씨가 건넨 말에 응어리진 마음이 눈 녹듯 풀렸다고 했다.

"여태껏 물의를 일으켰던 모든 말들은 다 마약 때문”이란 한마디였다.

얘기가 나온 김에 전씨에게 묻고 싶었다. 대마초에 빠진 건 음악 때문이었을까.

“마약을 6개월 이상 접하면 자학도, 각성도 모두 사라진다. 그냥 그 세계로 가는 거다.

어느 날 보니까 음악을 하고 싶어 마약을 하는지, 마약을 하고 싶어 음악을 하는지 모르겠더라.

 마약의 피해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그는 20년 전 헤어진 아내와 지난해 10월 재결합했다.

‘나가수’ 출연자들 초조해하는 모습에 실망

●예전처럼 방송 없이 공연 위주로 활동하나.

 “맞다. 공연 관객이 생각만큼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본 사람들은 무지 좋아하니까.

지산 밸리 록페스티벌에도 나간다. 사대주의에 젖은 젊은 친구들에게 우리 음악을 보여주고 싶다.

방송 출연은 끝까지 안 하려고 한다. 음악 하는 애들의 희망이 되면 그뿐이다(전).”

●방송하면서 록이나 밴드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 정도로 뭘 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다. 물론 우리랑 같은 색깔의 친구들도 있다.

루시드 폴이나 이적처럼(최).”

 여기까지 말했을 때 주씨가 입을 열었다. “난 없다. 나름대로 한다지만 뚜렷한 메시지나

교감하는 친구들은 없더라. 장기하와 얼굴들도 음악에 대해 절망에 차 있는 게 느껴진다.

가수는 고생을 많이 하거나, 아예 행복하거나, 그런 걸 솔직하게 보여줘야 하는데 감동할 만한 후배가 없다.”

●요즘 노래는 듣나.

 “요즘 노래는 딱 두 가지다. 나 너랑 자고 싶어, 아니면 나 너랑 헤어져서 죽겠어.

이거 말고 뭐가 있나(최).” “아이돌 노래는 다 똑같아서 구별도 못하겠더라.

요즘 대중음악을 산업으로 봤을 땐 이건 미디어와 기획사의 합작품이다.

우리는 이런 자본에 휘둘린 노래에 저항하고 싶다(주).” 전씨는 살짝 비난의 방향을 틀었다.

 “‘나는 가수다’에서 보면 그 가수들도 한참 노래하고 살았을 텐데, 떨어질까 초조해하고

울고 그러는 게 참 실망스럽더라. 음악이 저런 걸까.

우리한테 그렇게 행복을 주는 음악이 저런 걸까 말이다. 올림픽도 아니고 전국체전도 아닌데, 참.”

●그래서 결국 음악으로 돈은 못 벌었다.

 “벌려면 벌었겠지만 그 길로 가지 않았다. 나는 인생에서 돈을 맨 앞에 두지 않았다.

먹을 거나 생활비는 있어야 하는 거지만. 음악 하기 위해 기초생활수급자만 되면 좋겠다.

근데 조건이 어렵더라. 돈 때문에 음악 할 시간을 뺏기지 않았음 좋겠다(주).”

●나이 들어도 저항정신이 투철하다.

 “누군가 우리가 했던 걸 했으면 우린 다른 짓 하고 살았을 텐데 아무도 안 나오더라.

잘난 척이 아니라 10대 가수상 한 번 안 받고, 어떤 도움도 없이 여기까지 온 우리니까 하는 말이다.

그런 용기도, 포부도 없이 어떻게 음악을 하나(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