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이야기/음악이야기

김광석, 그리고 '김광석 다시듣기'

즐락지기 2011. 8. 15. 23:33

 

 

  • 간지 스페셜
  • 음악 및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친 핫 이슈들을 조명, 관련 음악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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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라는 흔한 말로 그를 감히 부를 수 있을까. 가객, 이라는 말이 그를 위해 주어진 건 바로 그런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빼어난 가수를 꼽는다면 반드시 다섯, 아니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고도 남을 그다. 그런 김광석이 떠난 지도 벌써 15년의 시간이 지났다. 1996년 1월 6일, 1000회가 넘는 공연 일정의 하루를 마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는 이 땅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목소리를 남기고. 훗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송강호가 분한 오광필 북한군 중사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며 말한다.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 이 영화 속 대사가 당시 관객들에게 생생한 현실처럼 다가왔던 건, 바로 그 목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이브레이션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울음을 참는 듯한 떨림. 폭넓은 음역대라는 말로는 부족한, 저음부터 고음까지의 더없이 자연스러운 흐름. 흘려 들어도 귓가에 생생히 박히는, 탁월하디 탁월한 가사 전달력. 그리고 명배우의 연기와 같았던, 범접할 수 없는 표현력. 이 모든 게 김광석의 목소리 안에, 그의 노래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1964년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입학 후 오보에, 바이올린 등 다양한 악기를 익히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 1982년 대학 입학과 함께 연합동아리에 가입, 본격적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풋풋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의 노래는 이내 대학가에서 입소문을 탔고, 스물한 살 때 김민기의 아동 뮤지컬 개똥이 음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김민기의 주도하에 이곳에서 만난 이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했고 1987년 10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첫 정기공연에서 녹두꽃을 열창했다.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이 공연은 김광석이 처음으로 대규모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의 이름 석자가 대중들에게 아로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정상에 섰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음색의 채도 정도가 살짝 차이가 있을 뿐. 힘과 떨림, 감정과 표현은 이미 당대를 넘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민중가요계에서 시작한 그의 경력이 개화한 건 88년 김창완이 제작한 동물원의 1집을 통해서였다. 앨범의 첫 곡이었던 거리에서가 당시 라디오에서 울려 퍼졌을 때, 밤늦게 라디오를 틀어 놓고 있던 청소년, 청년들은 말 그대로 전율에 휩싸였다. 그런 목소리는 듣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었으니까.

    김광석. 낯선 이름이었으되 강렬한 목소리였다. 김광석이 보컬을 맡았던 동물원의 노래들은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에 세상을 돌파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였다. 거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변해가네, 2집에 수록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이 바로 그런, 실패를 몰랐던 노래들이었다. 주로 대학로 소극장에서 열렸던 동물원의 공연은 전회 매진에 가까운 흥행을 올렸으며, 김광석의 목소리가 떨릴 때 관객의 마음도 떨렸다.
    유재하, 이문세-이영훈 콤비, 어떤날, 시인과 촌장 등이 속속 등장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아름다운 르네상스가 쓰여지던 그 시절, 김광석의 목소리는 그 흐름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에 다름 아니었다.
    88년 한 해 동안 내놓은 동물원의 두 장 앨범을 끝으로, 그는 홀로 서기를 시도한다. 1989년
    기다려줘와 너에게를 담은 솔로 앨범을 내놓은 것이다. 기타 한 대만 들고 어디서든 노래할 수
    있었던 김광석은 곧 대학 축제의 단골 초대 손님이 됐고, 민중가요가 지배하던 대학 문화의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김광석이란 대학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으며, 운동권과 일반 학생을 연결하는 가교였다. 사랑했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로 등이 담긴 2집은 그런 김광석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작품이었다.
    대학가를 기반으로 했던 그의 위치가 보다 보편적인 자리로 넓어진 건 아직도 그를 대표하는 앨범으로 꼽히고 있는 <다시 부르기>였다. 이등병의 편지, 광야에서, 말하지 못한 내 사랑 등, 노찾사부터 동물원을 거치는 동안 불렀던 노래들을 새롭게 녹음, 재수록한 이 앨범은 조동익의 수려한 편곡에 힘입어 앨범 전곡이 히트하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젊은 층이 모여드는 술집에서는 이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틀고, 그것도 모자라 수 차례 반복해서 다시 틀곤 했다. 말 그대로 버릴 곡 하나 없는 음반이었다. 나의 노래가 담긴 3집, 일어나가 수록된 4집, 그리고 한국 포크의 명곡들을 새롭게 해석한 <다시 부르기 2>까지, 그는 매너리즘을 몰랐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연했으며, 그 결과 한국 공연 사상 유례 없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 그렇기에 그의 요절은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생전 그의 공연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자랑거리가 될 만한,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자신의 노래는 물론, 남의 노래도 자신의 노래처럼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수. 그래서 가객이란 호칭이 자연스럽고 창작자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뮤지션이라는 호칭도 그에게는 전혀 위화감이 없다. 그 후로도 김광석을 대처할 수 있는 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에피소드 한 자락. 1999년이었던가. 김광석 추모 공연이 끝난 후 열렸던 뒤풀이 자리였다. 한국 포크 계의 거물급 관계자들이 모여 당시 인기 있던 어떤 가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니가 광석이의 자리를 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가 아닌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김광석은 그만큼 독보적이었다. 김광석의 요절과 함께 한국 포크의 명맥도 오랫동안 단절을 맛봐야 했다.

    하는 음악은 달라도, 음악을 하는 때는 달라도 김광석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은 뮤지션은 없을 것이다. 어느 가수보다 꾸준히 매년 추모 공연이 열리고, 한국 음악계를 주름잡는 이들은 마다하지 않고 그 무대에 서곤 했다. 또한 여러 차례 트리뷰트 앨범이 제작되곤 했다. 동료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한 앨범이 있었고, 김광석의 목소리에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를 덧입힌 기획 앨범도 있었다. 공연이건 앨범이건, 생전 김광석이 활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화제가 되곤 했다. 아마 이 땅에서 한국어로 된 노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 이어질 김광석에 대한 재해석.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김광석이 떠난 1996년 한국 대중음악계는 급속도로 기획사 중심의 시스템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음반 시장의 침체와 함께 자기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은 사실상 홍대 앞을 제외하면 데뷔하기조차 힘든 형국이 됐다. 90년대에만 해도 이른바 메이저에서 영역을 갖고 있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자기 음악과 인디는 사실상 동의어인 셈이다.

    <김광석 다시 듣기>는 김광석이 그러했듯, 지금 자신의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참가한 앨범이다. 김바다 정도를 제외한다면, 아마 생전의 김광석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을 까마득한 후배들이 모여 만든 최초의 김광석 트리뷰트 앨범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앨범은 더욱 가치 있다. 동료가 아닌 영향이라는 자장에서 지금 여기서 김광석은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장이기 때문이다. 유년기의 음악이었을 김광석을 현역 뮤지션이 된 지금 그들은 어떻게 소화할까. 이 앨범이 기획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졌던 궁금증이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의 음악으로 김광석을 접했을 세대는, 동시대 뮤지션들이 부르는 김광석을 어떻게 받아 안을까. 한 곡 한 곡, 따라가다 보면 그 해답이 나올지 모르겠다.

    글쓴이:김작가

    <곡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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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간지  http://kanzi.m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