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요제가 알아보지 못한 스타들
요즘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아닌 모양이다. 11등까지 기억해주는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한때 대학가요제도 그랬다. 이젠 ‘전국대학생노래자랑’이라 불리고 참가자가 아니라 축하공연을 하러 온 인기가수가 주인공이 되어버렸지만 1970~80년대에는 사정이 달랐다. 전국의 흑백TV로 전파를 보내는 날이면 거리가 한산해질 정도였던 대학가요제에선 꼭 대상을 타지 않아도 새로운 스타와 히트송이 되곤 했다. 물론 그럴만한 시대배경이 있었기에 성공했고, 또 그렇기에 한계도 명확했다. 하지만 ‘창작곡’이란 기준만큼은 큰 자극이 되었고, 이 때문에 가요계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많은 청년들이 대회 출전을 꿈꿨다. 심수봉, 노사연, 배철수, 김학래, 조하문, 유열, 신해철, 김동률, 김경호 등은 학창시절의 추억을 넘어 그 이상의 꿈까지 이루는 발판을 얻었다. 그런데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한 이들도 있다. 무슨 공모전에서 탈락했다거나 어떤 대회에서 떨어졌다는 경력을 적어놓는 경우가 드물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대망의 제1회 대학가요제에 친형제들로 구성된 ‘무이’라는 팀이 예선에 나갔지만 결선에는 오르지 않았다(혹은, 못했다). 산울림이다. 어떤 이는 맏형 김창완이 이미 졸업생 신분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어떤 이는 예선에서 아예 탈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 어떡해”라며 상심했는지는 몰라도 “아니 벌써” 그만둔 것만은 분명하다. 대신 동생 김창훈이 자기가 만든 곡을 주며 참가를 권유한 동아리 후배들이 덜컥 대상을 받게 되는데, 바로 샌드 페블즈와 ‘나 어떡해’다. 산울림은 발길을 돌렸지만 기념 삼아 만든 앨범이 대박이 나면서 대중음악사의 한 장을 버젓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나 어떡해’를 산울림 2집에 실었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뮤지션인 강산에도 1980년대 초반에 이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결과는? 예선에서 탈락. 심사위원들은 강산에의 가능성을 과감히 무시했다. 자고로 심사위원의 역할은 결선뿐만 아니라 예선에서도 엄청나게 중요한 법이다. 지금 생각하면 “예럴럴러” 소리 나오게 민망할지 몰라도 그는 훗날 충분한 보상을 받아냈다. 10년 후에 발표한 1집 [...라구요]는 훌륭한 아티스트의 첫걸음이었을 뿐이다.

1993년에 등장한 이한철 이후로 더 이상 스타를 배출하지 못한 대학가요제가 익스(Ex) 때문에 잠깐 주목받은 적이 있다. 2005년이다. 그 때 처음으로 밴드란 걸 만들었으니 여러모로 어설펐을 어떤 팀이 있었으니 예선탈락은 따놓은 당상관이요, 사필귀정이었다. 앵콜을 요청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이 팀은 집에 돌아가 조용히 공부나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겁도 없이, 그리고 여전히 어설픈 채로 앨범을 만들어 발표하고 만다. ‘앵콜요청금지’로 인디 동네의 스타로 등극할 브로콜리 너마저다.
미래의 스타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경연대회가 대학가요제만은 아니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오디션 프로그램 ‘배틀 신화’에 참가했다가 탈락한 소녀가 있었다. 가수의 꿈을 품고 찾아갔으나 돌아온 것은 화장실의 통곡뿐.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녀는 훗날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멤버 가인이 되어 보란 듯이 방송국을 휘젓게 된다. 어쩌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탈락자들 중에 슈퍼스타가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진정한 슈퍼스타는 후미진 동네의 작은 무대에서 자기 노래를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영광 있으라.
출처 : 간지 http://kanzi.m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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