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이야기/음악이야기

음악, 요절하다 (한국)

즐락지기 2011. 12. 18. 17:50

음악, 요절하다 (한국)

 

겨울은 비정하다. 만물은 쇠하고 생명은 움츠러든다.

우연이겠지만 한국 음악계의 여러 아티스트들도 이 시련의 계절에 생을 마감했다.

2011년. 한 해의 소멸을 앞둔 시점에서,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들'과 '음악'을 기려본다

 

차중락 (1941년 ~ 1968년 10월11일)

 

 

록의 초기 대중화를 견인했던 5인조 밴드 키보이스(Key Boys)에 이어 그룹 동료 차도균과 함께

가이스 앤 돌스(Guys & Dolls)를 결성하기도 했지만 그의 선두적 록 퍼레이드는 스물 여덟의

새파란 청춘에 멈추었다. (3년 후 요절한) 배호와 생전 묘하게도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고 대학에서

보디빌딩을 하기도 했던 우람한 '미스터코리아'이자 빼어난 미남이었다.

뇌막염으로 죽었지만 바로 이런 비주얼 덕에 사인을 두고 설왕설래가 계속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하면 흔히 남진을 떠올리지만 국내 팬들에게 먼저 모방의 연을 맺은 가수는

차중락으로 당대에 '한국의 엘비스'로 통했다. 실제로 1966년 엘비스의 곡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곡은 '사랑의 종말'과 함께

그의 시그니처 송이 됐고 엘비스의 바이브레이션을 유지하면서 국산화를 일궈냈다는 평가와

함께 가장 뛰어난 번안 곡으로 꼽히기도 한다.

 

 

배호 (1942년 4월 24일 ~ 1971년 11월 7일)

 

 

그가 죽었을 때 텔레비전은 이례적으로 추모 특집 쇼를 제작했다. 배호의 노래가 유행가를

뛰어넘어 '우리 대중가요의 자긍'이자 '20세기 문화유산'임은 그가 세상을 떠난 그때 당시

음악계도 알았다. 그 아쉬움과 경배의 정서는 조금도 줄지 않은 채 수십 년을 지배했다.

'불멸의 가수'는 오래된 그의 수식이다.

올해는 배호 사망 40주기. 6년 정도의 짧은 음악활동이었어도, 그토록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노래에 관한 한 한국 대중음악사의 최고 인물은 배호!'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이러니 신장염에 의한 그의 요절은 음악계의 거대한 손실일 수밖에 없다. 당대 리사이틀

무대에서 맹활약한 쇼MC 고(故) 최성일씨는 생전 “배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남진과

나훈아 라이벌 전도 그리 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 '능금 빛 순정',

'비 내리는 명동거리',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당신' 그리고 최후의 히트작인 '마지막 잎새' 등

대표곡들을 관통하는 놀라운 3옥타브의 음역, 곡예를 방불케 하는 음색 조절, 처절한 감정의

이입은 압권이다. 이후 아무도 그 세기적 매혹에 근접하지 못했다.

 


하수영 (1948년 ~ 1982년 1월1일)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1976년 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라디오 TV 전파와 가정을 강타했다.

경제성장의 그늘에 신음해온 주부에 대한 위로가 필요했던 시점이었고 하수영의 감미로운

음색과 매력 저음은 더욱 여성들을 안심시키기에 최적이었다.

1987년 부부 듀엣의 '부부'(아니면 1992년 김국환의 '우리도 접시를 깨뜨리자')가 나오기 전까지

남편들은 무조건 이 노래를 사들고 집에 들어가야 했다. 하수영은 작사 작곡에 편곡의 역량도 갖춘

인물이었지만 데뷔앨범의 대박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조운파 작사, 임종수 작곡이었다.

갑자기 뇌출혈로 서른넷 나이에 사망했다.

 


김정호 (1952년 3월 27일 ~ 1985년 11월 29일)

 

 

그는 TV에 나와 언제나 눈을 감고 노래했다. 웃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작은 새', '저 별과 달을'의 실제 작곡가로 알려지고 마침내

'이름 모를 소녀'로 최고 가수로 등극했을 때 시청자들은 벌써, 부동 속에서 처절하게

노래하는 그에게서 병색을 읽었다.

'하얀 나비'로 다시 정상을 밟았지만 대마초가수의 낙인은 그를 피폐로 몰고 갔고,

결국 폐결핵으로 서른셋에 숨을 모았다. '조용한 비틀' 조지 해리슨과 같은 날짜였다.

활동하던 시절에 남긴 '나그네', '님', '세월 그것은 바람' 그리고 마지막에 부른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를 들으면 회한과 고통의 절규에 치를 떨게 된다.

아마 사람들은 이후 장사익의 '찔레꽃', '국밥집에서', '님은 먼 곳에'와 같은 노래에서

한을 길어 올리는 김정호 창법의 일단을 모처럼 발견했을 것이다.

그의 퇴각은 포크의 추락이었고 그의 죽음은 통한(痛恨) 정서의 약화를 의미했다.


유재하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

 

 

A-D-C#m-F#-Bm-E. 더듬더듬 왼손에는 베이스를 오른손의 엄지, 중지,

새끼손가락은 삼음을 짚는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 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

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피아노 코드를 배우고 나서 가장 처음 접했던 곡이다. 음악 문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스승이자 선배이자 동료이기도 하다.

유재하 전과 후로 한국 대중음악사가 나뉜다는 말도 있다. 음악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1987년 < 사랑하기 때문에 >, '우리들의 사랑', '그대 내 품에', '텅빈 오늘 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Minuet(Inst.)', '가리워진 길', '지난 날', '우울한 편지', '사랑하기 때문에'.

앨범 전곡 작사, 작곡, 편곡의 1인 체제. 피아노, 기타, 바이올린, 첼로 등을 능숙히 다룰 줄 아는 '

멀티 플레이어'. 1989년 시작되어 사단을 창출한 <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 등.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뒤로 한 25살의 젊음. 그는 리스너, 가수, 연주자,

작곡가, 작사가, 지망생 모두에게 의미가 있었다.


장덕 (1962년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
장현 (1955년 ~ 1990년 8월 17일)

 

 

지금은 그 누구도 거의 기억하지 않고 있지만, 1990년 이들 남매의 잇따른 요절은 큰 충격이었다.

동생 장덕은 그해 2월 4일 약물 과다복용으로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서른넷이었던 오빠 장현은 6개월 후인 8월 16일 설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복고 가요들이 조명 받고 있는 요즘, 이들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여전히 박물관에 갇혀있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도 하지만, 살아생전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특히 장덕의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1970년대 '현이와 덕'라는 남매 듀엣을 결성하고,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하이틴 스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나, 일그러진 가정사와 자살 소동,

그리고 이어진 미국행은 그녀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줬다.

1980년대 귀국해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과 솔로 앨범 발표 등으로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님 떠난 후'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기의 중압감에 따른 우울증이 심해지고

약물 복용도 거듭되면서, 결국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장덕은 주어진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닌 직접 작곡, 작사를 했던 싱어송라이터였다.

뛰어난 멜로디 짓기와 언어의 마술사로 불려도 좋을 만큼의 가사 쓰기는 천재적이었다.

당시 자신의 마음 속 감정을 당당하게 세상에 던져놓은 여가수는 장덕이 거의 유일했다.

이들 남매에게 예정된 시간은 너무나 짧았었다.


빅토르 최 (Victor Choi, 1962년 6월 21일 ~ 1990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태어난 빅토르 최는 한국인 2세와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지만 반국가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이유로 퇴교 당했고 1982년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 '혈액형'이란

싱글을 발표해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펑크록이지만 러시아 특유의 음울하면서도 서정적인 선율로 사랑을 받았다.

< 이글라 >라는 영화에 출연해 1500만 명이라는 관중을 동원하며 < 황금의 쥬크 영화제 >에서

최우수 배우로 선정되어 러시아 젊은이와 변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자유와 저항을 울부짖던 빅토르 최는 의문이 가득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소련 전역에서 5명의 여성이 자살하는 등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김현식 (1958년 1월 7일 ~ 1990년 11월 1일)

 

 

“그저 빨리 떠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집착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그처럼 멋있고, 노래 맛있게 부르고, 어떤 음악이든 그럴 듯하게 부르는 이가 있나?”
- 동아기획 김영 사장


1980년대 가요계를 풍요롭게 한 동아기획 김영 사장의 말이 아니더라도 김현식은 눈물겹게

 빼어난 보컬리스트다. 특히 그의 유작 '내 사랑 내 곁에'는 비통한 울먹임으로 가슴을 찢는다.

김현식은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를 리드하는 주축이었다. 가왕(歌王) 조용필이 지배하던

메인스트림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판을 구축했다. 윤상은 그의 4집 '여름날의 꿈'을 작곡하면서

데뷔했고, 짧았지만 유재하와 함께 밴드를 하기도, 그의 노래 '가리워진 길'을 부르기도 했다.

김현식은 결국 음악에 투신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끝까지 앨범작업을 놓치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술에 의지하고 병색이 짙어 갈수록 그의 목소리는 깊어졌다.

테크닉이나 발성을 뛰어 넘어 거친 숨과 고단한 사랑을 내질렀다.

2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노래는 유령처럼 남아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


김성재 (1972년 4월 18일 ~ 1995년 11월 20일)

 

 

한 마디로 폼이 났다. 듀스 해체 이후 처음으로 솔로 무대를 가진 음악 순위프로그램에서

김성재는 다른 나라에서 순간 이동한 매끈한 신상품 그 자체였다.

고글과 아이스하키 의복을 껴입고 흑인 댄서를 대동한 화려한 무대는 당시에도 세련된 비주얼 충격이었다.

'말하자면' 역시 정점에 올라있던 이현도의 감각을 그대로 투사했다.

일반 가요 곡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펑키한 사운드에 보코더를 가미한 색감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이었지, 익숙한 우리의 문법이 아니었다.

알고 있다시피 김성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찬란한 무대를 남기고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사인에 대한 많은 논란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23살의 나이가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턱없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음악과 패션 스타일을 포괄하여

젊은 대중에게 흑인음악이 이처럼 멋스러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이는 김성재가 처음이었다.

 


서지원 (1976년 2월 19일 ~ 1996년 1월 1일)

 

 

그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노래를 불러놓고 왜 세상을 등져야만 했는지.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 10년이 지나고 가끔씩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내 눈물 모아'와의 만남이 겹쳐가면서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음색, 자신의 감정을 모두 토해내듯 울부짖는 절창은 무언가 큰 결심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음을.

그렇게 고스란히 세월을 쌓아온 이 곡은 빛바램 없이 아직까지도 나를 잊지 말라고 부탁하는

 '육성으로 남긴 유서'가 되었다.

외로움과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약관의 나이에 사람들의 곁을 떠나게 된 서지원,

그가 흘린 눈물은 오랜 시간 모여 다른 사람의 아픔을 달래주는 레테의 강물이 되었다.

 


김광석 (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

 

 

광고에 아이유와 듀엣을 부르는 모습이 등장해 화제가 된 김광석.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곧 16년이 된다. 상징인 수줍은 듯 절실한 그의 비브라토는

절박함을 지닌 우리들의 영원한 진실이었다.

'사랑했지만'을 작곡한 한동준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 통기타 음악의 계보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죽음은 순수 시대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김환성 (NRG 1981년 2월 14일 ~ 2000년 6월 15일)

 

 

 

사람 인생은 언제 왔다 언제 갈지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참인 명제다.

그러나 이것이 아직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한 스무 살 젊은이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이 문장은 상당히 가혹한 명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당시 엔알지(NRG)는 내놓는 앨범마다 연이은 성공을 거두며 제 1호 한류스타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공연 문제로 중국에 출국했다가 돌아온 김환성은 급성 호흡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진단을 받게 되고,

가망이 없다는 병원 측의 판단으로 호흡기를 떼어내고야 만다.

그는 그렇게 고통에 신음하며 우리 곁을 떠났다.

앞길 창창한 젊은이의 죽음, 그것도 희귀병으로 인한 어이없는 죽음이라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멤버들은 그의 사후, 네 번째 정규앨범에서 '비(悲)'라는 곡을 발표하며 떠난 고인의 넋을 기렸다.

 


터틀맨 (임성훈 1970년 9월 3일 ~ 2008년 4월 2일)

 

 

재즈나, 록, 힙합 등 소위 '마니아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되레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 자신도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좋은 음악이면 무엇이든.'이라는 태도로 다양한 음악을 들어왔지만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오는 가수들의 무대는 광대 짓이라고만 판단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려는

안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음악에 대해 진지한 글을 쓴다는 필자로서의 자세로 부적합함은 인정한다.

자기 변론을 하자면 이유는 이렇다. 한국 가요계에서 'TV속 가수'라하면 훤칠한 외모와 말 잘하는

기질의 '예능화'를 우선시하는 풍조로 되어가고 있었고, 이런 영향으로 노래를 직접 곡을 쓰고 직접 부르는

뮤지션과 가수, 음악가 등의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들이 퇴색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할까. 그래서 한동안은 TV에 나오면, 일단 보고 듣지도 않았다.

이런 삐뚤어진 시각을 고쳐주는데 '거북이'라는 그룹이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2008년 선천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기 전까지는 역시 TV속 그저 그런 쇼맨으로만 생각하고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고(故) 터틀맨(임성훈)은 직접 작사, 작곡, 편곡에 능한 인물이다.

7년간 2008년 < 오방간다 >의 활동까지 총 5개의 정규앨범에서 60여곡의 자작곡으로 활동했고,

줄 곳 라이브만을 고집했다. 이 두 가지만 놓고 봐도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며, 동시에 '거북이'라는

댄스 그룹이 녹록치 않은 팀이었다는 증명이다.

그리고 모든 가사의 맥락은 하나다.

/ 터질 것만 같은 행복한 기분으로 / 틀에 박힌 관념 다 버리고 이제 또 /

맨 주먹 정신 다시 또 시작하면 / 나 이루리라 다 나 바라는 대로 /

밝고 경쾌한 멜로디를 앞세워 전하는 그의 신념은 '희망'이었다. 음악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귀와 몸으로 받아지는 대로 느끼는 것. 그는 그 단순한 원리를 일깨워주었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1973년 ~ 2010년 11월 6일)

 

 

2003년, 루저의 삶을 정면에서 풀어놓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진원.

그의 노래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둡고 씁쓸하지만 경쾌한 멜로디와

씩씩한 목소리로 뽑아내는 이야기에는 어떻게든 될 거라는, 철없고 순수한 희망이 있었다.

2010년, 생활고와 지병이라는 큰 짐을 안고 살아오던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슬픔보단 허망함이 더 컸던 소식에 어쩐 일인지 모 인디뮤지션의 인터뷰 기사

한 줄이 겹쳐 떠올랐다.

'인디라 하면 다들 라면만 먹고 사는 줄 아는데 사실 안 그래요. 저희 잘 먹고 잘 살고 있거든요?'

언제쯤 사시미가 될 수 있을까 / 스끼다시 내 인생 (스끼다시 내 인생)
세상도 나를 원치 않아 /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 미친 게 아니라면 / 절룩거리네 (절룩거리네)


시간을 돌릴 순 없지만 기적이 일어나 다시 2003년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는 고급스런

사시미보단 맛깔스러운 스끼다시의 인생을 살 것 같다.

대한민국의 가난한 음악인이었던 달빛요정, 그의 노래에 구구절절 찌질한 진짜 우리 인생이 있다.

자료출처 : IZM(http://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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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내곁에 - 김현식

나의 모든 사랑이떠나가는 날이
당신의 그 웃음뒤에서 함께하는데
철이없는 욕심에 그 많은 미련에
당신이 있는 건 아닌지 아니겠지요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가는데
약속했던 그대만은 올 줄을 모르고
애써 웃음지으며 돌아오는길은
왜 그리도 낯설고 멀기만 한지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가사 출처 : Daum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