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스텡게트(Mistinguett)와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가 프랑스 샹송계를 지배하였다. 두 사람은 뮤직 홀이 채택한 대규모 버라이어티 쇼인 르뷔(revue)의 스타가 되어 카지노 드 파리, 폴리 베르제르 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재즈(jazz)는 1917년에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었는데, 그 리듬이 널리 보급된 것은 1925년에 르뷔 네그르(Revue nègre)를 통해 르뷔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한 조세핀 베이커(Joséphine Baker)에 의해서다. 그녀는 「두 연인(J'ai deux amours)」 등 흑인 음악에 바탕을 둔 수많은 샹송을 불렀다. 1930년대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는 점차 스윙(swing: 흑인 재즈 음악을 온화하게 백인화한 음악)의 리듬을 프랑스 샹송에 통합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1937년에 「기쁨 있으리(Y'a d'la joie)」(모리스 슈발리에 노래)를 발표하여 유명해진 샤를 트르네(Charles Trenet)였다. 가수로도 데뷔한 그는 「바다(La Mer)」 등의 많은 명곡을 남겨 ‘노래하는 광인(fou chantant)’이라 불렸고 모리스 슈발리에와 함께 ‘환상적 샹송(chanson fantaisiste)’을 대표하는 가수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미레유(Mireille)는 재즈와 샹송을 결합한 독특한 창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한편, 티노 로시(Tino Rossi)와 뤼시엔 부아이예(Lucienne Boyer)는 감미로운 연가(romance) 등 ‘매혹적 샹송(chanson de charme)’으로 사랑을 받은 반면, 브뤼앙으로부터 시작된 사실적 샹송의 전통은 다미아(Damia), 프레엘(Fréhel), 이본 조르주(Yvonne Georges)를 거쳐 에디트 피아프에게 계승되었다.
전 가정에 보급된 라디오는 19세기말에 출현한 디스크보다도 샹송의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또한 영화가 토키(talkie; parlant[프]: 발성영화) 시대에 접어들자 샹송은 영화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많은 음악 영화들이 잇달아 성공하였고, 배우들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자신이 출현한 영화에서 한두 편의 샹송을 불러야 했으며, 티노 로시처럼 가수들이 영화배우로 데뷔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기존의 스타들(티노 로시, 모리스 슈발리에 등) 외에 새로운 세대의 샹송 가수들이 부상하여 각광을 받았다. 에디트 피아프는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 「사랑의 찬가(L'Hymne à l'amour)」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브 몽탕(Yves Montand)은 「낙엽(Les Feuilles Mortes)」 등 자크 프레베르의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여 인기를 누렸다. 샤를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와 질베르 베코(Gilbert Bécaud)는 미국 스타일의 샹송과 창법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작사·작곡·노래를 겸하는 통기타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였는데, 조르주 브라상스(Georges Brassens), 자크 브렐(Jacques Brel), 기 베아르(Guy Béart), 레오 페레(Léo Ferré), 바르바라(Barbara)가 그들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실존주의의 영향 하에 있던 센강 좌안(rive gauche)의 셍 제르멩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가 새로운 ‘문학적 샹송’의 중심지가 되는데, 그곳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쥘리에트 그레코(Juliette Gréco)이다(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를 비롯한 많은 작가·시인이 그녀의 곡의 가사를 썼다).

1950년대 말부터는 스윙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 음악의 물결이 유럽 대륙에 상륙한다. 그것은 바로 로큰롤(rock and roll)인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비롯한 미국의 로큰롤 스타들은 프랑스에서 ‘예예(yéyé)’라는 맹목적인 추종 세력을 낳는다. 그에 따라 조니 알리데(Johnny Halliday),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리샤르 앙토니(Richard Anthony), 프랑스 갈(France Gall), 프랑수아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셸라(Sheila), 에디 미트셸(Eddy Mitchell), 클로드 프랑수아(Claude François), 미셸 폴나레프(Michel Polnareff) 등 젊은 가수들이 10대들의 우상이 되고, 10대들은 디스크와 카세트 테이프의 가장 중요한 소비자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예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미레이유 마티외(Mireille Mathieu)와 같은 전통 샹송 가수들, 장 페라(Jean Ferrat)와 같은 참여 가수들, 바르바라, 클로드 누가로(Claude Nougaro), 세르주 겡스부르(Serge Gainsbourg)와 같이 작사·작곡·노래 또는 작사·노래를 겸하는 새로운 세대의 가수들에 의해 성인들을 위한 샹송이 계속 성행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까지 가사를 중시하는 성인 샹송과 음악을 중시하는 10대들의 샹송 사이의 구별이 지속된다. 미셸 사르두(Michel Sardou)가 전자의 예라면 록 가수인 베로니크 상송(Véronique Sanson)과 텔레폰(Téléphone) 그룹은 후자의 예에 속한다. 1970년대 말부터는 이른바 '프랑스 누벨 샹송(nouvelle chanson française)'을 이끈 새로운 가수들이 출현하였는데, 자크 이즐렝(Jacques Higelin), 베르나르 라빌리에(Bernard Lavilliers), 미셸 조나스(Michel Jonasz), 제라르 망세(Gérard Manset), 이브 뒤테이유(Yves Duteil), 알렝 수숑(Alain Souchon), 막심 르 포레스티에(Maxime Le Forestier), 르노(Renaud), 이브 시몽(Yves Simon), 프랑시스 카브렐(Francis Cabrel), 장 기도니(Jean Guidoni)가 그들이다.
1981년에 라디오 방송에 대한 국가의 독점권이 폐지되자 수많은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나 음악 방송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영미 음악의 영향이 두드러지는데, 장 자크 골드만(Jean-Jacques Goldman)을 비롯한 새로운 세대의 가수들에게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말부터 파리는 세계 음악이 혼합되는 도가니가 된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전통 음악과 록 음악이 뒤섞이고 프랑스 랩 음악(le rap français)이 탄생한다. MC 솔라르(MC Solaar)와 같은 가수는 미국에서 탄생한 랩에 샹송의 오랜 전통을 결부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프랑스 랩에서는 가사가 중요시되고, 시적인 언어 유희가 많으며, 사회 비판이 매우 강하다. 1995년에는 모든 라디오 음악 방송의 40%를 프랑스 샹송으로 편성해야 하는 쿼터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샹송이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조처는 또한 영미 음악의 헤게모니에 대항하고 새로운 인재가 쉽게 출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