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고 ‘기타 귀신’은 지미 헨드릭스
역사상 최고 ‘기타 귀신’은 지미 헨드릭스
미 ‘롤링 스톤’지 선정
28세 요절한 미 흑인 뮤지션·에릭 클랩턴·지미 페이지 순
스물여덟 살에 요절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1942~1970)가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선정됐다.
미국의 대중음악 잡지 ‘롤링 스톤’이 전 세계 대중음악 전문가와 유명 기타리스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헨드릭스가 1위를 차지했다고 로이터통신이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슬로 핸드’라는 별명을 가진 에릭 클랩턴은 2위, 하드록 밴드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페이지가 3위에 올랐다.
그 뒤로는 4위 키스 리처즈(롤링 스톤스), 5위 제프 벡, 6위 B.B.킹, 7위 척 베리, 8위 에디 반 헤일런,
9위 듀언 올맨(올맨 브러더스 밴드), 10위 피트 타운센드(더 후) 등의 순이었다.
그래미상을 수상한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는 “헨드릭스는 록 음악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며
“그는 기타를 자유자재로 연주했을뿐 아니라 술집과 녹음실, 공연 무대를 휘젖고 다녔다”고 말했다.
헨드릭스는 흑인 특유의 감성을 기반으로 강렬하고 공격적이면서도 선율이 아름다운 명연주를 남겼다.
여러 가지 핑거 테크닉을 다양하게 구사한 연주법으로 유명하다.
환각제를 복용한 상태에서 이로 기타줄을 물어뜯어 연주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헨드릭스의 기타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정작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1966년 런던에서 활동할 당시
에릭 클랩턴과 제프 벡 등이 그를 찬양한 이후였다.
67년 데뷔 앨범 ‘아 유 익스피리언스드’에서 충격적인 사이키델릭 하드록 사운드를 연주해 화제가 됐다.
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출연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뜻에서 미국 국가를 변형시킨 ‘스타 스팽글드 배너’를
연주하는 등 기타 연주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걸작 앨범을 발표했다.
28세였던 70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중앙일보 정재홍 기자
1967년의 지미 헨드릭스
제임스 마셜 "지미" 헨드릭스 (James Marshall "Jimi" Hendrix; 1942년 11월 27일~1970년 9월 18일)는
여러 음악 팬들과 비평가들은 헨드릭스를 록 역사상 최고이자 가장 영향력 있었던 기타리스트로 손꼽는다.
그는 유럽에서 첫 번째 성공을 거둔 후, 1967년 미국의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그리고 1970년 Isle of Wight Festival에서 역사적인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1942년 11월 14일 시애틀에서 본명이 지미 마샬 헨드릭스(Jimi Marshall Hendrix)인 지미는 알코올 중독자인
어머니와 댄서로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지미는 12살 때
아버지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았고 이것으로 인해 음악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곡들을 카피하며 10대 시절 밴드를 만들어 기타연습에 몰두했던 그는 마약문제와
학업부진으로 인해 결국 고등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만다. 곧바로 군대에 입대하였지만 부대 내에서도
캐주얼(Casual)이란 밴드를 이끌며 그는 기타에 대한 열정과 애착을 보였다.
이후 부상으로 인해 조기에 제대를 하고 난 후 지미의 재능을 높이 산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에 의해
그의 밴드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지미는 리틀 리처드와의 활동 외에도 비비 킹(BB King), 로니 영블러드(Ronnie Youngblood)와 같은 거물급
아티스트들과 작업했으며, 이로부터 그의 실력과 명성은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지미 헨드릭스는 자신의 음악을 펼치고자 홀로서기를 선언하며 1965년 리틀 리처드 밴드를 떠난 지미 제임스(Jimi James)와
블루 플레임스(Blue Flames)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베이시스트 노엘 레딩(Noel Redding)과
드러머 미치 미첼(Mitch Mitchell)을 구하여 3인조 밴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Jimi Hendrix Experience)를 조직한다.
그리고 영국에서 먼저 발매한 불후의 명곡들인 <Hey Joe>, <The Wind Cries Mary>, 그리고 <Purple Haze>가 인기를 얻었다.
1967년 몬트레이 팝 페스티벌(Monterey Pop Festival)에 참가하여 명 연주 끝에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 뇌리에 각인 시킨 그는
기타의 판도를 완전하게 바꾸어버린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Are You Experienced」(67)를 발표한다.
세상은 그의 기타 연주에 주목했고 지미는 활화산과도 같은 폭발력과 원초적인 에너지로 기타의 정형성을 타파해 가며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비타협적이고도 창조적인 산물들을 그득하게 뽑아냈다.
1968년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Axis : Bold As Love」에서도 지미는 <Spanish Castle Magic>, <Wait Until Tomorrow>,
<Little Wing>, <If 6 Was 9>과 같은 록기타의 불멸의 고전들을 토해냈다. 그리고 같은 해 1968년 세 번째 앨범이자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마지막 앨범인 「Electric Ladyland」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에는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을 비롯한 수많은 후배 기타리스트들이 영향을 받은, 독보적인 원시성과
싸이키델리아의 정수를 표출하는 명곡 <Voodoo Child>를 비롯하여 <Rainy Day, Dream Away>, <Crosstown Traffic>과
밥 딜런(Bob Dylan)의 원곡보다 더 유명해진 <All Along The Watchtower> 등이 담겨있다.
1969년 초 밴드가 해체된 후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지미는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 '일렉트릭 레이디랜드'를 건립하며
실험적인 성격의 곡들을 창안해내는 데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69년 여름에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에
이전 동료였던 미치 미첼, 빌리 콕스(Billy Cox)와 함께 참여하여 <The Star Spangled Banner>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듬해인 1970년 그는, 오랜 친구인 버디 마일스(Buddy Miles), 빌리 콕스와 밴드 오브 집시스(Band Of Gypsys)를 결성하며
필모어 이스트에서 가진 공연 실황을 담은 동명 타이틀 라이브 앨범 「Band Of Gypsys」(70)를 발표하였지만 1970년 9월 18일
불행히도 약물중독으로 인해 세 장의 정규 앨범만으로도 세상을 평정했던 불꽃같은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
지미의 죽음 이후에도 록 음악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무수한 라이브 앨범과 편집 앨범,
미발표곡들이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발매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보통 완전한 왼손잡이로 착각 하는 경우가 많은데 , 실제로는 오른손잡이라고한다.
왼손으로 기타를 치는이유는 앨버트킹을 동경해서 왼손으로 기타를 연습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헨드릭스는 1970년 9월 18일 영국 런던의 스마르칸트 호텔의 지하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사인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수면제를 과다하게 복용해서 구토 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질식해 죽었다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는 독특하고 혁신적인 기타주법과 형식에 얽매인 블루스의 한계를 뛰어넘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하드 록과 헤비 메틀은 위시한 모든 장르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일렉트릭 기타 연주의 진정한 파이오니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