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이 뭐길래! MC 이상벽의 못 다한 이야기

[TV리포트 윤상길 편집위원] 가히 세시봉 열풍이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세시봉 가수들의 노래와 이야기가 2010년 추석 때 TV에 나와 폭발적 반응을 얻고 난 뒤 해를
넘기며 지속되고 있다.
TV에선 재방송에 스페셜 방송까지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세시봉 친구들’의 전국 순회공연은
가는 곳마다 매진 행렬이다.
요즘 세대들에게는 새롭지만 낯설기 짝이 없는 이름 세시봉. ‘아주 멋져’란 의미의 이 프랑스어
한 마디가 프로그램 시청률을 쑥 올려놓는 성과를 넘어 사회 전체 문화에 대한 생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기타와 청바지가 불티나게 팔리고, 기타학원 수강생이 늘었는가 하면, 통기타 가수가 출연하는
라이브 카페에도 손님들이 몰리고 있다.
‘세시봉 신드롬’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다.
도대체 세시봉이 무엇이길래! 세시봉의 터줏대감이라는, 그래서 세시봉 가수의 속내를 가장
잘 안다는 MC 이상벽(64)을 만나 ‘세시봉 신드롬’의 발화점을 찾아보았다.
한국저작권단체총연합회 이사장실(그는 이 연합회의 이사장이다. 방송MC에 사진작가에 유명강사에
이제 공직의 얼굴로까지 참 바쁜 사람이다.)에서 만난 그는 ‘세시봉 신드롬’의 발화점은 ‘현대인의
외로움’에서 시작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외로움이 일상화된 시대입니다. 국민 3가구 가운데 1가구가 1인가구라잖아요.
혼자 밥 먹고 차 마시는 사람도 흔하고, 극장에서, 관광객 행렬에서도 ‘나홀로족’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이야기를 하고 싶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이죠.
혼자라는 사실은 이야기를 할 데도 들을 데도 없다는 것이고, 결국 외로움에 치를 떨 수밖에요.
그런데 세시봉에는 이야기가 있었던 거죠. 이야기가 담긴 세시봉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이야기는 외로움을 치유하는 명약인 셈입니다.”
이 시대의 이야기꾼다운 설명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영화를 보려고 극장을 찾은 관객의 35%가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며, 여행을 떠난 관광객의 41%는 친구 없이 홀로 길을 나선 이들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이 같은 추세라면 2030년에는 도시에 사는 젊은이의 60%가 형제 없이 자라고,
20대의 55%는 부모와 떨어져 혼자 생활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혼자가 곧 외로움이라고 할 때
지금의 세시봉 열풍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현대인의 몸부림에서 시작됐다는 해석이다.
“요즘 세시봉 친구들과 주말마다 전국 순회 콘서트를 열고 있어요.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이 노래하고
제가 사회를 보는데 전석 매진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40대 이상 중장년 관객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절반은 20대 젊은 관객이 차지하고 있어요. 친구와 온 사람도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온 사람이 더 많았어요. 세시봉이 이야기 나눔의 현장이기도 하지만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의 장소라는
사실을 알고 행복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하다. 그래서 ‘셀카촬영’이나 ‘시체놀이’로 여가를 보내기도 한다.
이야기를 잊고 사는 것이다. 여기에 가족의 핵분열은 심화된다. ‘독거노인’만 있는 게 아니다.
‘독거 청년’도 만만치 않다. 이래저래 세상은 이야기를 잊고 산다. 그런 세상 속의 젊은이들이 세시봉을
통해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시봉을 통해 가족을 찾고, 선후배와 어울리며 이야기의
즐거움을 찾는다. 이야기가 풍성한 TV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고, 노랫말이 아름다운 노래들이 풍성한
컨서트에 빠져든다. 그 중심에 세시봉이 있다.
“당시(1960~1970년대) 세시봉에 출입하던 대학생은 물론 젊은이들은 요즘에 비해 촌스러웠으나 낭만이
있었고, 개인보다 사회를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었지요. 젊음을 발산하면서도 폭넓은 시야로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자기표현이 자유로웠고(이야기가 많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이 있었으며, 만나는 사람들은
나름의 끼와 개성이 있었지요. 저도 그런 청년이었고요.
1953년 ‘명동장군’으로 불리던 육군 준장 출신의 김모씨가 서울 명동에 처음 문을 연 세시봉은 그후 축구선수
출신의 이흥원씨(75년 작고)가 인수해 충무로1가, 소공동을 거쳐 64년 무교동(정확하게는 종로구 서린동 115번지,
당시 스타더스트호텔 지하)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시봉 시대’를 연다.
그리고 69년 TV보급 등에 따른 누적된 적자로 문을 닫았다.
“그 시대의 세시봉이 ‘통기타 가수들의 산실’, ‘청바지문화의 원조’라 불리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실보다는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방황하던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과 건강한 정서를 제공한 ‘문화전위대’로서 평가하고
싶습니다.”
무대와 객석이 혼연일체가 되는 1백여평의 세시봉에는 입장료 30원을 내고 들어온 청춘남녀들로 연일 성황을
이루었다. 음악감상실이었던 세시봉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요일별 프로그램을 운영해 큰 호응을 얻었다.
“홍익대학 미술대 학생이었던 저는 수요일의 ’즉흥시 백일장‘과 금요일의 ‘대학생의 밤’ MC를 맡았어요. 세시봉
프로그램의 MC로는 이백천(78·대중음악평론가·한국포크싱어연합회 고문), 정홍택(75·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두 분이 계셨는데 제가 바통을 이어받아 세시봉 3대 MC가 되었어요”
그가 사회자로 선 첫 무대가 세시봉이었다. 그가 동아리 활동을 했던 홍익대 밴드가 ‘대학생의 밤’에 초대되었고,
이때 당연직 사회자로 나선 것이다. 첫 무대에서 선배 MC와 손님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그는 이 프로그램의
고정 MC가 되었고, 세시봉 가수들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다. 그를 통해 세시봉 무대에 선 사람이 조영남과
송창식이다.
“68년 어느 수요일 ‘대학생의 밤’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로 했던 가수 차중락(그해 급성 뇌막염으로 작고)이 지병이
도져 펑크를 냈어요. 그래서 급히 대타를 구해 무대에 세웠죠. 손님 중에서 지원자를 불러냈어요.
그 사람이 조영남입니다. 어느 텁수룩한 머리에 인상도 좋아 보이지 않는 학생이 번쩍 손을 들더군요.
당시에는 안경을 쓰지 않았어요. 게다가 화창한 날 우비와 장화차림이었던 그는 한눈에 보아도 정상인이 아니었어요.
제가 마이크를 건네자 조영남은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겠다며 저보고 마이크를 대고 있으라는 거예요.
하도 기세가 당당해서 원하는 대로 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네가 잘하면 얼마나 잘한다고 폼을 잡아’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남일해(60년대 톱가수)의 ‘이정표’를 기가 막히도록 멋들어지게 부르는 거예요. 그때 조영남에게는 출연료로
10장의 세시봉 무료입장권이 주어졌어요. 가수 조영남의 대중무대 등장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홍익대 근처에서 살던 송창식도 이상벽의 권유로 세시봉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홍대 근처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송창식은 그때 공사장 야방(경비)을 하고 있었다. 낮 시간에 그는 홍익대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러 대학 교문을 들락날락했다.
그때 기타를 처음 배웠다. 홍대 잔디밭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어느 날 이상벽이 세시봉 주인 아들
이선권씨(전 동양방송 PD)를 데려와 인사를 시키면서 홍익대학 대표로 ‘대학생의 밤’에 출연하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가짜 대학생’ 송창식의 세시봉 시절이 열렸다.
“그리고 송창식이 윤형주와 이장희를, 윤형주가 김세환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세시봉 가수군단이 꼴을 갖추게 됐죠.”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은 물론 한대수
이장희 강근식 김민기 양희은 어니언스 등 소위 ‘세시봉 군단’의 대소사에 그는 빠지지 않는다. 디너쇼나 콘서트의
사회는 당연히 그가 맡는다. 사생활 영역에도 그의 그림자는 늘 드리워져 있다. 최근의 ‘세시봉 친구들 콘서트’
사회를 그가 맡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 마지막으로 이 콘서트를 두고 항간에 떠도는 ‘진정성’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긴 합니다. 추억을 파는 장사꾼이란 비난도 듣습니다. 하지만 세시봉 시절 청춘으로서
무대에 섰던 사람들과 좌석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만나는 이 같은 모임을 경제이론으로 접근하는 시각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시봉 음악의 진정성이 세대를 초월하면서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콘서트 현장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이 시대에 공유할 수 있는 음악 이야기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7080 콘서트 붐에 비하면 10여 년이나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갔지만 ‘세시봉 콘서트’는 그 시대를 겪은 중장년층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 세대까지 감동시키고 있다. 당시의 세시봉이 서슬 퍼렇던 독재 정권 하에서 억압당하던 청춘들에게 해방구가
되었다면 지금의 세시봉은 청년 백수 100만명 시대에, 입시지옥에 허덕이는, 등록금 압박에 아르바이트 현장으로 내몰리는
21세기 젊은이에게 문화특구가 되고 있다. 아날로그 시대의 음악이 40여 년의 강을 지난 디지털 시대에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추억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추억의 편지를 배달하는 집배원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편지에는 젊은 날의 낭만이
가득 담겨 있답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 그 중심에 세시봉 가수들은 늘 자리 잡을 것입니다.”
세시봉이 뭐 길래! 세시봉에는 이야기가 있다. ‘혼자’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가 있다. “세시봉은 이야기다” 이상벽의 진단이다.
사진=김재창 기자
윤상길 편집위원 yoonsk4u@tvreport.co.kr